명백한 D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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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계산을 해보니까 저도 감염된 지가 벌써 4년이 됐더라고요. 솔직히 처음 1년 동안은 방황을 좀 했었어요. 흔히 감염되고 나서 자살도 생각하고 우울증도 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저는 가진 돈을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해외도 자주 나가고, 축제, 파티, 여기저기 막 돌아다녔어요. 한동안 그러다보니까 이제 경로를 정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제 삶의 경로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면서, 좀 더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3년차에는 거의 일만 하면서 보냈던 것 같아요. 이 병 신경 안 쓸려고 더 일만 했던 것도 같고. 이제 4년찬데 지금도 열심히 일하면서 나중에 죽어서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즐겁게 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약간 아팠다고 할까? 서러웠던 게 있었어요. 어깨가 아파서 입원을 했을 때였는데 은근히 홀대하더라고요. 감염내과에서 협진을 요청해서 진행한 거였는데, 팔 한번 휙 돌려보고는 엑스레이 상에 괜찮으니까 가라고 하더라고요. 대기 환자가 많긴 했찌만 제 입장에선 기분이 나빴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는데 1분도 안 돼서 가라고 하니까. 이걸 확 뒤짚어 엎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그냥 참고 나왔어요.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진짜 마음이 아픈 건, 부모님한테도 얘기 못했다는 거에요. 조카가 있는데 조카를 안아주는 것도 부담스럽고. 혹시 모르니까요. 애들이 할퀴거나 그럴 수도 있으니까. 지금 만나는 사람이 PL이 아니라서 키스도 맘 편하게 못하는 것도 그래요. 하지만 PL들이 수도승으로 살겠다, 비감염인을 사귈 용기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스스로 너무 주눅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어요. 외국 같은 경우엔 자기가 ”프렙(PrEP, HIV 노출 전 예방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식으로 돌려서 오픈시키거든요. 나는 프렙을 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PL이란 말은 안 하는 거죠.


 물론 전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고 웬만한 불편은 감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장애물이 있고 제약이 있으니까, 온전히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못하고, 그런 걸 신경쓰다보니까 마음만 자꾸 닫히고, 그래서 외롭고...... 우리가 가지는 불편함, 우리가 감수하고 있는 외로움은 누군가가 우리한테 심어준 죄의식 때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과거로부터 전염병을 퇴치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격리였잖아요? 백신을 통해서 사라진 전염병은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한테 해당되는 격리는, 누군가가 우리한테 심어준 바로 그 죄의식 아닐까요?


 제 애인은 제가 PL이란 걸 알고 있어요. 말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사이가 더 좋아지기 전에 얘기를 해야겠다는 결론이 났어요. 그래서 애인한테 대쉬할 때,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HIV감염인이고, 꾸준히 약 먹으면서 잘 컨트롤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는데, 바이러스가 미검출이고 면역수치도 정상이다. 그런데 니가 만약에 딴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이 감염인일 수 있지만 너한테 얘기 안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위험한 애를 선택할래? 안전한 나를 선택할래?


※ “PL”은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People Living with HIV)을 줄여 감염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표현입니다. 

※ 이 글은 KNP+가 펴낸 감염인 스토리북 <선물>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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