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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저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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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처럼 저녁식사를 마치고 안방 화장실로 향했다. 수납장에서 꺼낸 HIV항바이러스 약통을 물끄러미 보는데 그날따라 기분이 묘해졌다. 처음 항바이러스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알약을 볼 때마다 비극적인 운명의 상징처럼 느껴졌는데, 언젠가부터는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숙제를 하듯 가볍게 약을 삼키고 있었다. 나 자신이 대견하다고 할까, 비극에 익숙해진 내가 헛헛하다고 할까, 기분이 묘해진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씩 한번 웃어주고는 약통에서 알약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삼키려는 순간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딸이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나는 약통을 수납장 속에 다시 감춰두고 안방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딸이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뭔가 잘못됐음을 알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러니? 왜 우는 건데?”

 “아빠... 저도 알아요... 안방 화장실에서... 아빠가 먹는 약... 인터넷으로 찾아봤어요... 아픈 건데, 아파서 먹는 약인데... 왜 숨어서 드세요... 이제 그냥 편하게 드세요... 담배 절대 피지 마시구요... 제발... 건강 잘 챙기세요...”


 이를 악 물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냥 ”고맙다“고만 말하고 집을 나섰다. 마트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사서 집 앞 공터로 향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붙이려는 순간 저만치 걸어오는 아내가 보였다. 나는 담배와 라이터를 양손에 쥔 채 어정쩡히 그대로 서있었다. 다가온 아내가 나를 한참동안 처연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알았어요. 안방화장실에서, 그 약을 봤대요. 다 이해한대요. 가족이니까, 아빠니까. 당신 마음도 이해해요. 딸이니까 더 괴롭겠죠. 마누라는 그렇다 치고, 자식한테는 숨기고 싶었겠죠. 그래도 고맙잖아요. 우리 딸이 저렇게 착하고 똑똑해서. 안 그래요?“


 어제는 사무실 창가에 서서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핸드폰사진을 찍는 회사 동료들을 지켜봤다. 볕이 워낙 좋아서 그들의 환한 웃음처럼 사진도 화사하게 나왔을 게 분명했다. 고개를 들었더니 한 무리의 새떼가 먼 하늘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창가에서 돌아서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PL들이 새를 닮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프라인 모임에 나오는 PL 동료들은 새들처럼 우르르 떼를 지어 벚꽃놀이를 가고, 영화를 보러 가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하긴 새들뿐이랴. 힘없고 약한 존재들은 무리를 지어 사는 법 아닌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나와 함께 무리지어 날고 있는 새들 중에는 나의 어진 아내와 똑똑하고 예쁜 딸과 PL 동료들이 있었다. 


※ “PL”은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People Living with HIV)을 줄여 감염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표현입니다. 

※ 이 글은 KNP+가 펴낸 감염인 스토리북 <선물>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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