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0년에 확진을 받았다. 그때는 CD4 수치가 안정권이어서 그 후 2년이 지난 때부터 약복용을 시작했다. 그런데 약 복용 시기가 늦었던 탓인지, 그 후로 혈액암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을 앓아야 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았던 병원에서는 의료진들로부터 가끔은 의료차별을, 가끔은 고마움을 경험했다.
내가 경험했던 첫 번째 의료차별은 3년 전이었다. 다니는 감염내과가 있는 병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였다. 회사에 월차를 미리 냈던 나는 일찌감치 집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대기의자에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예약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호명되길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이 병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제일 마지막인 건가? 이게 차별이라면, 나는 화를 내고 따져야 하는 건가? 아니면, 참아야 하는 건가?’
그렇게 병원 대기의자에 두 시간 가까이 앉아 되풀이하는 질문을 속으로만 곱씹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가장 마지막에 위 내시경을 받았다. 하지만 항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의사가 저번 진료시간이 늦어진 점을 내게 사과했다. 앞 환자의 진료시간이 길어진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의사의 변명을 납득할 수 없었고 당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항의하지 못했다.
위 내시경 검사가 있은 지 석 달 후, 두 번째 의료차별을 경험했다.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였다. 잠이 오질 않아서 간호사에게 수면제를 부탁했더니, 신경정신과와 협진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양봉하는 사람처럼 보호 장비로 온몸을 감싼 신경정신과 인턴이 나타났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따져 물을 힘도 없어서 “가...”라고 짧게 말했더니, 그 인턴은 “예.”하고 짧게 말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두어 시간 뒤, 의사가운 차림의 신경정신과 교수가 와서 문진을 하고는 수면제를 처방해주었다.
반대로 눈물 나게 고마웠던 사례도 있었다. 항암을 받던 기간에 폐렴이 와서 입원했을 때였다. 병실에 누워있는 나에게 감염내과 인턴이 찾아와서 채혈을 시작했다. 혈관이 잡히지 않아서 애를 먹던 그 인턴이 내 손등에서 겨우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찌른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인턴이 주사바늘을 빼다가 실수로 자기 손을 찔러버렸다. 그때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계속 그 인턴이 걱정되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문제가 쉽게 떨쳐지지가 않아서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사바늘에 찔린 그 인턴 분... 괜찮으세요?”
간호사는 약을 먹고 조취를 취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믿지도 않는 하느님을 찾으며 그 인턴이 제발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인턴이 다시 채혈을 하러 나타났다.
“그때 일은... 괜찮으신 거죠?”
그 인턴은 나를 보고 빙긋 웃고는 호탕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혹시라도 걸렸으면 약 먹으면 되죠 뭐! 우리 교수님이 혹시라도 걸렸으면 교수시켜준대요! 하하!”
그 인턴은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밝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 그 인턴이 가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인턴이 고마워서 울었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워하는 내 처지가 불쌍해서 또 울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다시 병원을 찾게 됐을 때, 간호사에게 그 인턴에 대해 물었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PL들 중 어떤 이는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지점도 있으니 적절히 타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타협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료진들은 환자가 바뀔 때마다 적어도 신체에 닿는 의료기기를 소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 의료행위를 하고 있다면, PL이라고 해서 가장 뒤에 진료를 하거나 병명을 환자의 신체에 붙여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의료진으로서 의학적 상식이 있다면, HIV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노출되는 순간 사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확진 이후로 나는 많은 부분에서 욕심을 내려놓았다. 예를 들어, 인생의 목표라던가, 승진이라든지, 물욕이라든지...... 덕분에 사회의 경쟁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의료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염인 인권활동에 관한 의욕이 솟구친다.
※ “PL”은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People Living with HIV)을 줄여 감염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표현입니다.
※ 이 글은 KNP+가 펴낸 감염인 스토리북 <선물>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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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0년에 확진을 받았다. 그때는 CD4 수치가 안정권이어서 그 후 2년이 지난 때부터 약복용을 시작했다. 그런데 약 복용 시기가 늦었던 탓인지, 그 후로 혈액암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을 앓아야 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았던 병원에서는 의료진들로부터 가끔은 의료차별을, 가끔은 고마움을 경험했다.
내가 경험했던 첫 번째 의료차별은 3년 전이었다. 다니는 감염내과가 있는 병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였다. 회사에 월차를 미리 냈던 나는 일찌감치 집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대기의자에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예약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호명되길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이 병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제일 마지막인 건가? 이게 차별이라면, 나는 화를 내고 따져야 하는 건가? 아니면, 참아야 하는 건가?’
그렇게 병원 대기의자에 두 시간 가까이 앉아 되풀이하는 질문을 속으로만 곱씹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가장 마지막에 위 내시경을 받았다. 하지만 항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의사가 저번 진료시간이 늦어진 점을 내게 사과했다. 앞 환자의 진료시간이 길어진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의사의 변명을 납득할 수 없었고 당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항의하지 못했다.
위 내시경 검사가 있은 지 석 달 후, 두 번째 의료차별을 경험했다.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였다. 잠이 오질 않아서 간호사에게 수면제를 부탁했더니, 신경정신과와 협진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양봉하는 사람처럼 보호 장비로 온몸을 감싼 신경정신과 인턴이 나타났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따져 물을 힘도 없어서 “가...”라고 짧게 말했더니, 그 인턴은 “예.”하고 짧게 말하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두어 시간 뒤, 의사가운 차림의 신경정신과 교수가 와서 문진을 하고는 수면제를 처방해주었다.
반대로 눈물 나게 고마웠던 사례도 있었다. 항암을 받던 기간에 폐렴이 와서 입원했을 때였다. 병실에 누워있는 나에게 감염내과 인턴이 찾아와서 채혈을 시작했다. 혈관이 잡히지 않아서 애를 먹던 그 인턴이 내 손등에서 겨우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찌른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인턴이 주사바늘을 빼다가 실수로 자기 손을 찔러버렸다. 그때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계속 그 인턴이 걱정되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문제가 쉽게 떨쳐지지가 않아서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사바늘에 찔린 그 인턴 분... 괜찮으세요?”
간호사는 약을 먹고 조취를 취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믿지도 않는 하느님을 찾으며 그 인턴이 제발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인턴이 다시 채혈을 하러 나타났다.
“그때 일은... 괜찮으신 거죠?”
그 인턴은 나를 보고 빙긋 웃고는 호탕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혹시라도 걸렸으면 약 먹으면 되죠 뭐! 우리 교수님이 혹시라도 걸렸으면 교수시켜준대요! 하하!”
그 인턴은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밝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 그 인턴이 가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인턴이 고마워서 울었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워하는 내 처지가 불쌍해서 또 울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다시 병원을 찾게 됐을 때, 간호사에게 그 인턴에 대해 물었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PL들 중 어떤 이는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지점도 있으니 적절히 타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타협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료진들은 환자가 바뀔 때마다 적어도 신체에 닿는 의료기기를 소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 의료행위를 하고 있다면, PL이라고 해서 가장 뒤에 진료를 하거나 병명을 환자의 신체에 붙여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의료진으로서 의학적 상식이 있다면, HIV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노출되는 순간 사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확진 이후로 나는 많은 부분에서 욕심을 내려놓았다. 예를 들어, 인생의 목표라던가, 승진이라든지, 물욕이라든지...... 덕분에 사회의 경쟁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의료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염인 인권활동에 관한 의욕이 솟구친다.
※ “PL”은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People Living with HIV)을 줄여 감염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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